한국
탑파(塔婆) 개관(槪觀)
97 최진호
탑이란 범어로 스투파, 파리어(巴利語, Pali)로 투파의 음사에서 유래된 약칭이다. 이는 사리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발생한 불교의 독특한 조형물로서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조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탑파(塔婆) 건립의 목적은 사리 신앙에 있으므로 이는 불상과 함께 불교의 양대 예배대상으로서 널리 추앙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석탑이 발생한 시기는 삼국시대 말인 60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교가 전래된 372년부터 약 200년 사이에는 중층의 목탑이 건립되었을 것인데, 이러한 예로 평양 청암리사지 8각 목탑지, 부여 군수리사지, 금강사지의 목탑지, 황룡사지 9층 목탑지 등이 있다. 이러한 목조 탑은 비바람과 화재에 약하기 때문에 이보다 영구적이고 우리 주변에서 많이 산출되는 석재를 사용하여 탑을 만들게 되었다.
삼국시대 우리 나라의 석탑은 백제, 신라가 서로 대립하여 각기 다른 양식으로 출발하였다. 백제는 목탑의 양식을 기본으로 하여 이후 석재로써 그 형식을 착실히 다져나갔다. 현존하는 백제 탑으로 미륵사지 석탑과 정림사지 5층석탑이 있다. 한국 석탑의 시원이 된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의 각 부재를 모두 석재로 바꾸어 건립한 것이다. 이 석탑은 단층기단, 기둥의 엔타시스 형식, 창방(昌枋)과 평방(平枋), 두공(頭工)양식을 약화한 3단의 받침이 옥개석(屋蓋石)을 받고 있는 점 그리고 초층 탑신을 통하여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것 등 목탑 가구의 세부를 충실히 모방하고 있다. 미륵사지 석탑이 단순히 목재를 석재로 바꾸어 건립되어진 형식을 가졌다면 정림사지 5층석탑에 이르러서는 각부의 양식에 예술적 기량이 더해져 과감한 삭제와 간결화를 보여주어 백제에서의 석탑의 양식을 확립시키게 된다.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은 목탑의 양식을 따랐지만, 세부양식이 약화되며 예술적으로 정돈되고 정형화되었다.
신라에서는 이와는 달리 처음에는 목조 탑의 형식을 적용하였다가 중국식 전탑(塼塔)을 모방한 양식이 유행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신라석탑으로 분황사 모전석탑과 의성 탑리 5층석탑이 있다. 이들은 1층 탑신에 감실을 설치하고 옥개 상하는 전탑처럼 층단형을 이루고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국토와 국민의 통합뿐만 아니라 문화와 예술에 있어서도 융합을 가져왔다. 석탑에 있어서도 동서 두 지역에서 따로 발생하였던 목탑계와 전탑계의 석탑이 하나로 집약·삼국통일 이후 목탑형식의 백제계 석탑과 전탑형식의 신라계 석탑이 조화를 이루어 이중기단 위에 중층(특히 3층)의 층탑, 그리고 5단의 옥개받침인 전형양식을 낳게 된다. 이러한 신라 전형양식은 통일기의 감은사지 3층석탑과 고선사지 3층석탑을 그 시원으로 하여 불국사 석가탑에서 완성된 형태를 볼 수 있다. 이렇게 통일신라기에 확립된 전형양식의 석탑은 통일신라시기 뿐만 아니라 고려, 조선에까지 이어져 한국석탑 양식을 대표하게 된다. 하지만 통일신라시기에 이러한 전형양식의 석탑만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전형양식에 비해 양식적으로 다양한 표현을 가한 이형석탑도 건립되어진다.
고려시대의 탑파미술은 그 조형미에 있어서 신라시대와 같은 영광을 보지 못하고 선종의 영향으로 인해 부도나 석비 제작에 그 주도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지방 호족의 성장으로 옛 백제지역에서는 미륵사지 탑과 정림사지 탑의 영향을 받은 석탑들이, 또 한강 이북지역에는 고구려의 영향이 남아있는 다각의 석탑들이 건립되어 지고 신라 전형양식의 석탑들도 만들어지는 등 다양한 건축양상을 보여준다. 고려시대의 석탑은 별석(別石)의 등장이나 5층의 석탑이 유행하고 옥개석이 두꺼워지면서 옥개석의 반전이 심해지는 등의 나름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나 전대에 비해 장중한 맛이 사라지고 세부 조각에 있어서도 형식적으로 흐르는 약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탑은 숭유억불정책과 아울러 장인을 천시하는 풍조 때문에 더욱 쇠퇴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많은 석탑이 만들어지지 못했으며, 몇몇의 대표적인 탑들 역시 고려시대나 신라시대의 양식적 특징을 모방하여 만들어져 뚜렷한 나름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지 못한다.
통일신라 때 형성된 한국 석탑형식은 정사각형의 평면을 기준으로 하여 기단과 탑신, 상륜부로 형성되는데 기단은 이중기단이 보편적이다. 상하기단과 탑신부에는 양옆모서리에 우주(隅柱)라고 하는 기둥을 모각하여 목조탑 형식을 반영하고 있다. 대체로 탱주의 수는 시대가 내려오면서 줄어든 경우를 볼 수 있으며, 옥개석의 층급(層級)받침 역시 초기의 5단 받침에서 시대의 하강에 따라 줄어든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옥개석 네 모서리가 보다 경쾌하게 들려 반전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초기의 경직되고 단조롭던 형식에 비추어 시대가 뒤지면서 더욱 반전이 심해지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우리 나라는 탑이라는 종교적 건축을 받아들임에 있어 초기에는 중국적인 것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으나 후대에 내려갈수록 우리의 기후와 풍토, 그리고 우리의 자연환경에 알맞은 한국적 불탑을 탄생시켰다. 우리가 가장 친근히 접할 수 있는 돌들이 우리 조상들이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바로 그 탑으로 승화된 것이라 하겠다.